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군 6진 (문단 편집) == 기타 == * 조선은 [[여진족]]에게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는 교린 정책을 실시했다. 그 중 강경책이 이 4군 6진의 개척이다. 회유책으로는 [[경성군|경성]]과 [[경원군|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반농반수렵 생활을 하던 여진족들이 자급자족할 수 없던 종이, 면포 등의 여러 물품을 모피 등과 교환토록 했고, 여진인들의 [[조공]]과 [[귀화]]를 장려했으며, 여진 추장들에게 천호, 만호 등 조선 정부의 명예직을 주었고, 서울 [[흥인지문]] 근처에 북평관이란 객관을 만들어 조공을 온 여진 사신들의 진상품을 받고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런 회유책들은 [[명나라]]가 크게 성장한 건주여진을 매우 경계하여 여진과의 정식 교류를 끊으면서 조선에서도 더 이상 시행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조선은 명나라의 바람과는 달리 여진과 완전히 적대하지는 않고 [[만포시|만포]]진에서 약간의 식료품을 교류하는 등의 최소한의 우호 활동은 계속했다. *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전가사변, 사민정책(徙民政策)의 경우 이 4군 6진 개척 때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졌고 실제로 이 때의 이주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그 전에도 시행된 적은 여러번 있었다. 기록상 가장 처음은 고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때로 이때 주변 많은 사람들을 9성 지역에 이주시켰지만 1년만에 땅을 반환하면서 많은 이가 해를 입었다고 한다. 덕종 때에도 정주(靜州)에 1,000호를 이주시켰다. 조선의 경우 1398년(태조 7년) 경원부 지역을 얻은 후 관내 지역에 사는 부유한 백성들을 이주시켰고, 1410년(태종 10년) [[두만강]] 주변 부거참에 1,000여 호를 이주시켰다. 다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엔 무작정 끌고 간 건 아니었고, 법적으로 이주 혜택이 있었다. 사민정책에 호응하여 북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양반이면 자품(資品)을 높여 주거나 토관직을 주었고, 향리나 역리(驛吏)일 경우 부역을 면제(免役)해 주고 관직 진출의 길을 열어 양반으로 높여 주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천인은 면천(免賤)되어 양인이 되었고, 역시 부역이 면제되었다. 지금은 잘 와닿지 않지만, 신분제 사회에 부역의 강도도 높았던 당시엔 큰 혜택이었기 때문에, 함길도([[함경도]])보다는 살만했던 [[평안도]] 지방의 경우 자발적인 이주가 많이 이루어져 강제적 이민의 필요성이 많이 없었다. 때문에 세종 19년 ~ 20년에 [[세종(조선)|세종대왕]]이 [[평안도]] 일대에서 천여 호를 뽑아 국경 연변에 이주시키고, 그 빈 자리에는 다시 [[황해도]], 하삼도의 주민을 뽑아 이주시키려는 이중 사민 꼼수를 부리려 했으나, 당연히 관리들과 백성들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큰 혜택을 준다곤 해도 개척하는 과정에서의 고통까지 경감되는 것은 아닌지라, 많은 이들이 개척 과정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아 자리를 완전히 잡으면 한 단계 위의 신분을 누리고 부역 걱정도 없이 살 수 있었지만, 그 살아남아 자리잡는 과정 자체가 힘들었다. 당시 동북방 지역은 미개척 지역이었고,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하던 때와는 기온부터가 달랐다. 삼국시대-고려 초기까지는 전체적으로 지구의 기온이 높고 온습하여 한반도 북방지역도 땅이 기름지고 풍족했지만, 천 년이 지난 조선시대부터는 기후가 가혹해지면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한 땅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북방 유목민들이 휘젓고 다니면서 농업 관개시설 인프라가 박살이 났다. 무엇보다 동북 지방은 척박해서 당시 조선에서 주로 하던 벼농사를 짓기가 어렵다. 특히 [[개마고원]]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난한 함경도 해안지역도 연강수량이 600 mm ~ 700 mm에 불과하고, 여름에 안개가 자주 끼고 흐리기 때문인데, 벼농사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름에도 냉해를 입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지방을 막 개척하던 세종대왕 시절에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 상륙한다. 육진 지방과 환경이 [[스칸디나비아 반도|비슷]][[캐나다|한]] [[러시아|곳]]에서 잘 자라는 [[호밀]]은 1920년대에나 한반도에 상륙했다.]도 없었다. 키울 수 있는 작물은 오직 [[콩]],[* 현재도 두만강 유역은 콩의 원산지이다.] [[메밀]], [[귀리]]밖에 없었다. 더욱이 [[개마고원]]은 [[메밀]]조차 못 자라는 극한지다. 그나마 연변 지방은 지대가 낮고 땅이 기름진 편이라 당대에도 벼농사가 가능했던 땅이었고, 더 북쪽으로 가면 삼강평원이라는 비옥한 흑토지대가 있기는 했지만, 4군 6진 개척만으로 버거웠던 조선은 더이상의 영토 확장이 힘들다고 느껴서 결국 개척을 포기하고 한민족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확정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이 당시에도 범죄자는 큰 혜택 없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훗날 동북방 지역이 일종의 유배지 같은 기피 지역 이미지가 된 이후에는 자발적인 이주 같은 건 어림도 없었다. 가기 싫은 사람들은 자해하면서까지 안 가려고 버텼지만 얄짤없이 보내졌고, 돈 있는 사람이나 매를 바친 사람은 자동으로 빠졌다. * 이주된 자들 중에는 면천되자마자 도망친 자들도 있었는데, [[선조(조선)|선조]] 때 도망자들의 후손들을 색출하니 바로 [[쇄환령]]이다. * [[천명제|누르하치]]가 여진 통일전쟁 당시 초창기의 적수였던 홀라운 우디거를 격파한 것이 이 육진의 종성도호부 근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